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문단 편집) == 배경 == ||[[파일:attachment/uploadfile/libyamap.jpg|width=100%]]|| ||3월 초순 시위대의 기세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의 세력도. 이후 일시적으로 진압되어 기세가 줄어들었지만, 최종적으로는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아 전국을 제압하였다. [[http://twitter.com/#!/iyad_elbaghdadi|Iyad El-Baghdadi]]가 제작하였다.||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최고 지도자인 [[무아마르 카다피]]는 2011년 권좌에서 쫓겨나기까지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하였다. 이는 현재 세계 각국의 지도자 중 최장의 기록이다. 그가 이토록 장기 집권이 가능했던 데에는 무바라크와 정반대로 [[반미]] 사상이 주효했다. 실제로 80년대에는 미국이 그를 [[오사마 빈 라덴]]에 버금가는 위험 인물로 지목해 잡으려 들 정도였다. 놀랍게도 과거엔 소위 운동권을 위시해 '''반미주의자들의 이상적인 영웅상'''이었던 시절도 있으며 지금도 그렇게 떠받드는 사람들이 있다. 프랑스의 좌파 저술가가 민주주의와 저항 정신을 가진 위대한 인물이라고 찬양한 서적이 국내에까지 번역 출간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명지대학교]]'''에서 '''당시 총장을 파견하면서까지 2002년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적 있으며,'''[* 이유는 카다피가 [[콩고 내전]] 등 아프리카 지역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애써왔고 1999년 아프리카연합 창설을 주도하는 등 북아프리카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아랍민족주의를 제창해 아랍권 통합에 앞장선 공로를 평가했다나 뭐라나...] '''2003년에는 제9회 한국 불교인권상을 수상받기도 했다.'''[[http://v.media.daum.net/v/20110301081115190|#]] 위의 설명대로 당시 운동권에서의 이미지와 몰락 이전 카다피가 친한파로 통했던 점, 더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에서 김정일에 대비되는 '현명한 독재자'로 카다피를 띄워준 것의 결과. 1969년 당시 리비아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해외로 나간 틈을 타서 육군 [[대위]]였던 카다피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한 이후 계속 권좌에 있다. 왕정을 폐지한 대신 카다피는 아랍 민족주의에 사회주의를 뒤섞은 '이슬람 사회주의'를 제시했고 정치 사상을 압축하여 '녹색책[* 시위 사진 중에 녹색 구조물을 시위대가 쓰러뜨리는 것이 있는데 그게 녹색책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을 집필하였다. 77년에는 공화국에서 '[[자마히리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대중의 국가'라는 뜻이다. 카다피가 만든 단어. [[반미]], 반유대 노선의 선두에서 전세계의 반군, 게릴라 단체에 적극적인 지원을 하기도 하였고, 이로 인해 팬암기 폭파 사건 등의 몇 차례의 테러에 연루되었다. 결국 UN 안보리와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의 낙인이 찍혔고 레이건 시절에는 수도 트리폴리가 폭격당하기도 했다. 핵 개발의 의혹이 있기도 했다. 이 시절 얻은 별명이 ''''중동의 미친개''''. 이런 상황에도 국유화한 유전을 통해 경제를 이끌어 나갔다. 2009년 GDP가 9529불. 이 정도면 아프리카에선 정말 잘 사는 축이다. 이러다가 [[조지 W. 부시]] 행정부 집권 2기에 이르러 갑자기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 카다피의 치명적인 실수였으며, 소위 말하는 '''리비아식 해법'''이 배척되는 이유다. 참고로 카다피는 생전에 북한에게 비핵화를 설득하기까지 했는데 그런 카다피가 죽었으니, 카다피에게 했던 지켜지지 않은 약속(리비아식 해법)을 더욱 믿을 수 없게 된 셈이다.]을 하면서 잘못을 실토하고(?) 국제적 활동을 재개했다. 팬암기 폭파 사건의 보상 문제도 다시 논의가 진행되었다. 집권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 원수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랫동안 군림 중인 집권자 --혹은 독재자-- 중 하나로 그의 패션 센스는 세계 최악의 컨셉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카다피는 트리폴리 폭격 이후 항상 유목민처럼 커다란 텐트를 치고 숙소로 삼는데 국내 뿐 아니라 해외인 뉴욕에 방문해서도 똑같이 하려다가 미국 시민들의 주거지 침해로 무산되었고 UN 총회에서 장시간 연설에 빈축을 사기도 했다. 튀니지의 벤 알리, 이집트의 무바라크에 이어 다음 타자가 누가 될 것인가 하는 예상에서 양국 사이에 있는 리비아를 지목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부패와 아들로의 권력 승계 움직임, 자유와 인권의 박탈, 고실업 등으로 내부 불만도 어느 정도 있는 상황. 그러나 상대적으로 풍족한 데다가 오랫동안의 신격화와 반대 세력 탄압으로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실제로 11년 1월에 있었던 시위는 탄압과 2.4조 달러를 풀어서 식량과 집을 공급하겠다고 나서는 등 유화책을 펼치면서 유야무야 되어버렸다. 리비아는 원래 3개의 국가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왕국이었다. 서부의 해안의 트리폴리타니아, 동부의 키레나이카, 서부 사막의 페잔이 합쳐진 것. 그래서 처음 동부의 [[벵가지]]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트리폴리에서는 벵가지의 시위대의 행동을 비판한다는 말이 합쳐져서 시위는 동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이 나왔다. 그러나 막상 불이 한 번 붙자 엄청난 불길로 번졌는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